어느 날이었습니다.
저 멀리, 무언가를 피해 움직이는
두 여자 아이가 보였어요.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에 가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께서 아이들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 아이들은 두 팔을 뒤로 숨긴 채 뒷걸음 치다가
아예 등까지 돌려 움직이고 있었고요.
마침 주차 공간 안쪽에서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어른이 나타났습니다.
아이들은 곧장 그분 뒤로 숨었고요.
무언가를 건네려는 할머니와
이를 받지 않는 아이들.
이들은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을 사이에 두고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
마침 가던 방향이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좀 더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어르신께서 손에 쥔 물건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형체가 펄럭이는 걸로 봐서 종이 같았습니다.
멀리서 봤지만 햇살에 초록빛이 비쳤고요.
그렇게 점점 더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저는 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건네는 건 이상한 물건도,
홍보용 전단지도 아닌
"돈"이었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 2장이더군요.
대충 분위기를 봐선
할머니가 사랑스러운 두 손녀에게
용돈을 건네고 있었고,
아이들은 차마 받을 수 없다는 듯
사양을 하며 피하고 있던 겁니다.
어찌 보면 별 일이 아니다만
전 돈을 피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풍요 의식"이 떠올랐습니다.
주지만 받지 못하는 사람의
어릴 적 신념체계와 함께요.
어릴 적부터 이런 교육을 받아온 분들이 많을 겁니다.
"어른이 돈을 주면 덥석 받지 말고
사양하는 게 예의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어찌나 교육을 잘 받았던지
친척 어른이나 부모님의 지인들이 용돈을 주면
뒷걸음을 치며 도망가고는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
라면서 말이죠.
삼세판의 민족이라 그런지
세 번은 거절해야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주시는 돈조차
다시 돌려드리려 했던 적도 있었죠.
그냥 의례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복된 행동은
인간의 신념체계에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그 신념은
다음과 같이 확장될 수 있죠.
"어른이 주는 돈은 덥석 받지 말고 사양해라."
→ "어른이 주는 돈을 받는 건 예의가 아니다."
→ "상대에게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
→ "나는 돈을 받을 수 없다."
→ "나는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을 수 없다."
→ "세상은 이런 곳이다."
|
차라리 남에게 주면 줬지
본인이 무언가를 받는 걸
어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은 도움조차 받기 어려워하죠.
주지만 받지는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설령 무언가를 받더라도,
도움을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보답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죄의식으로
받은 만큼 되돌려주려고 합니다.
상대의 선의를 선의로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부채와 같이 느끼는 겁니다.
보답을 하지만
그 보답에 가슴에서 우러나온 감사만 있는 게 아니라
껄끄러운 부채를 정리하는 청산의 개념도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보살핌 받는 걸 스스로 거부합니다.
스스로 풍요를 누리지도 못합니다.
그의 세계관은 '각박함'이 채우고 있거든요.
자신의 삶에
"결핍의식"이 아니라
"풍요의식"을 가득 채웠으면 합니다.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받는 연습을 하세요.
상대의 선의를 기꺼이 선의로 받아들이고
마음껏 감사하세요.
할머니가 사랑스러운 손녀들에게
부정 청탁으로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넸겠습니까.
시커먼 흑심이 있었을까요.
오해하지 마세요.
받는 연습을 한다는 건
세상을 "내놔~!"의 태도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세상이 선사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돈이 들어오는 통로를 잔뜩 막아두고
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풍요의 에너지를 거부한다면
그만큼 타인에게 줄 수 있는
풍요의 에너지도 제한됩니다.
점점 더 세상과 단절되고 고립될 겁니다.
흐름이 막혔으니까요.
모든 건 원활히 흐를 때 건강합니다.
상대의 선의를 감사히 받는 건
오히려 상대에게도 도움 되는 일입니다.
상대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세요.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세요.
상대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
라는 풍요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세요.
그럴수록 상대의 세계 역시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존재"
로 규정하지 말고,
"세상과 기꺼이 주고받을 수 있는 나"
로 새롭게 인식하세요.
그렇게 점점 더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풍요의식으로 삶을 가득 채우세요.
삶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의 삶에
풍요가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 멀리, 무언가를 피해 움직이는
두 여자 아이가 보였어요.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에 가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께서 아이들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 아이들은 두 팔을 뒤로 숨긴 채 뒷걸음 치다가
아예 등까지 돌려 움직이고 있었고요.
마침 주차 공간 안쪽에서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어른이 나타났습니다.
아이들은 곧장 그분 뒤로 숨었고요.
무언가를 건네려는 할머니와
이를 받지 않는 아이들.
이들은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을 사이에 두고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
마침 가던 방향이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좀 더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어르신께서 손에 쥔 물건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형체가 펄럭이는 걸로 봐서 종이 같았습니다.
멀리서 봤지만 햇살에 초록빛이 비쳤고요.
그렇게 점점 더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저는 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건네는 건 이상한 물건도,
홍보용 전단지도 아닌
"돈"이었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 2장이더군요.
대충 분위기를 봐선
할머니가 사랑스러운 두 손녀에게
용돈을 건네고 있었고,
아이들은 차마 받을 수 없다는 듯
사양을 하며 피하고 있던 겁니다.
어찌 보면 별 일이 아니다만
전 돈을 피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풍요 의식"이 떠올랐습니다.
주지만 받지 못하는 사람의
어릴 적 신념체계와 함께요.
어릴 적부터 이런 교육을 받아온 분들이 많을 겁니다.
"어른이 돈을 주면 덥석 받지 말고
사양하는 게 예의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어찌나 교육을 잘 받았던지
친척 어른이나 부모님의 지인들이 용돈을 주면
뒷걸음을 치며 도망가고는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
라면서 말이죠.
삼세판의 민족이라 그런지
세 번은 거절해야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주시는 돈조차
다시 돌려드리려 했던 적도 있었죠.
그냥 의례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복된 행동은
인간의 신념체계에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그 신념은
다음과 같이 확장될 수 있죠.
"어른이 주는 돈은 덥석 받지 말고 사양해라."
→ "어른이 주는 돈을 받는 건 예의가 아니다."
→ "상대에게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
→ "나는 돈을 받을 수 없다."
→ "나는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을 수 없다."
→ "세상은 이런 곳이다."
차라리 남에게 주면 줬지
본인이 무언가를 받는 걸
어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은 도움조차 받기 어려워하죠.
주지만 받지는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설령 무언가를 받더라도,
도움을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보답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죄의식으로
받은 만큼 되돌려주려고 합니다.
상대의 선의를 선의로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부채와 같이 느끼는 겁니다.
보답을 하지만
그 보답에 가슴에서 우러나온 감사만 있는 게 아니라
껄끄러운 부채를 정리하는 청산의 개념도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보살핌 받는 걸 스스로 거부합니다.
스스로 풍요를 누리지도 못합니다.
그의 세계관은 '각박함'이 채우고 있거든요.
자신의 삶에
"결핍의식"이 아니라
"풍요의식"을 가득 채웠으면 합니다.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받는 연습을 하세요.
상대의 선의를 기꺼이 선의로 받아들이고
마음껏 감사하세요.
할머니가 사랑스러운 손녀들에게
부정 청탁으로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넸겠습니까.
시커먼 흑심이 있었을까요.
오해하지 마세요.
받는 연습을 한다는 건
세상을 "내놔~!"의 태도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세상이 선사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돈이 들어오는 통로를 잔뜩 막아두고
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풍요의 에너지를 거부한다면
그만큼 타인에게 줄 수 있는
풍요의 에너지도 제한됩니다.
점점 더 세상과 단절되고 고립될 겁니다.
흐름이 막혔으니까요.
모든 건 원활히 흐를 때 건강합니다.
상대의 선의를 감사히 받는 건
오히려 상대에게도 도움 되는 일입니다.
상대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세요.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세요.
상대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
라는 풍요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세요.
그럴수록 상대의 세계 역시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존재"
로 규정하지 말고,
"세상과 기꺼이 주고받을 수 있는 나"
로 새롭게 인식하세요.
그렇게 점점 더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풍요의식으로 삶을 가득 채우세요.
삶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의 삶에
풍요가 가득하길 기원합니다.